달려라 메로스(走れメロス)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메로스는 격노했다. 반드시 그 간사하고 포학한 왕을 없애버리리라고 결의했다. 메로스는 정치를 모른다. 메로스는 마을의 양치기다. 피리를 불고 양과 놀면서 살아왔다. 하지만 사악에 대해서는 남달리 민감했다. 오늘 미명(未明) 메로스는 마을을 출발해서, 들을 넘고 산을 넘어 10리 떨어진 이 시라쿠사시(市)에 왔다. 메로스에겐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다. 아내도 없다. 16살의 내성적인 누이동생과 둘이서 살고 있다. 이 누이동생은 마을의 어느 성실한 양치기를 머지않아 신랑으로 맞게 되었다. 결혼식도 얼마 남지 않았다. 메로스는 그것 때문에 신부의 의상이나 축하연에서 대접할 음식같은 것을 사러 멀리 떨어진 도시에 온 것이다. 먼저 그 물건들을 사 모으고, 그리고나서는 도시의 대로를 어슬렁어슬렁 걸었다. 메로스에게는 죽마고우가 있었다. 세리넨티우스다. 지금은 이 시라쿠사시에서 석공으로 일한다. 그 친구를 이제부터 찾아갈 작정이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찾아가는 것이 즐거웠다. 걸어가는 사이에 메로스는 거리의 모습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고요했다. 이미 해도 져서 거리가 어두은 것은 당연하지만, 그래도 어쩐지 밤 탓만이 아니라 시 전체가 몹시 쓸쓸하다. 낙천적인 메로스도 점점 불안해졌다. 길에서 마주친 젊은이를 붙잡고 무슨일이 있었나, 2년 전에 이 도시에 왔을 때는 밤에도 모두가 노래하고 거리는 번화했을 터인데 하고 질문했다. 젊은이는 고개를 젓고 대답하지 않았다. 좀 더 걸어서 노인과 마주쳐서, 이번에는 더욱 어세를 높여 질문했다. 노인은 답해주지 않았다. 메로스는 양손으로 노인의 몸을 흔들며 질문을 거듭했다. 노인은 주변을 신경쓰는 낮은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임금님은 사람을 죽입니다."
  "왜 죽이지?"
  "악심(惡心)을 품고 있다고 말합니다만, 아무도 그런 악심을 가지고 있지 않지요."
  "많은 사람을 죽였나?"
  "예, 처음에는 임금님의 처남을, 그리고나서는 자신의 후계자를. 그리고서는 누이동생을, 그리고나서는 누이동생의 자식을. 그리고나서는 황후마마를, 그리고나서는 현신(賢臣)이신 아레키스님을."
  "놀랐다. 국왕은 미치광이인가?"
  "아니요, 미치광이는 아닙니다. 남을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요즘에는 신하의 마음도 의심하셔서, 약간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자에게는 인질을 한명씩 바치도록 명하셨습니다. 명령을 거부하면 십자가에 매달려 죽습니다. 오늘은 여섯명 죽었습니다."
  듣고 나서 메로스는 격노했다. "기가 막힌 왕이다. 살려둘 수 없어."
  메로스는 단순한 남자였다. 산 물건을 등에 진채로 느릿느릿 왕성에 들어갔다. 순식간에 그는 순라를 도는 경리(警吏)에게 체포되었다. 조사를 받아서 메로스의 품 속에서는 단검이 나와서, 소동이 커지고 말았다. 메로스는 왕의 앞에 끌려갔다.
  "이 단도로 무엇을 할 작정이었나. 말하라!" 폭군 디오니스는 조용히, 하지만 위엄을 갖추고 물었다. 그 왕의 얼굴은 창백하고, 미간의 주름은 새겨진 것 처럼 깊었다.
  "도시를 폭군의 손에서 구하려 했다."고, 메로스는 주눅들지 않고 대답했다.
  "네놈이?" 왕은 비웃었다. "별수없는 녀석이로군. 네놈은 내 고독을 모른다."
  "닥쳐라!" 메로스는 격분하여 반박했다. "남의 마음을 의심하는 것은 가장 부끄러워해야할 악덕이다. 왕은 백성의 충성조차도 의심하고 있어!"
  "의심하는 것이 정당한 마음가짐이라고 내게 가르쳐 준 것은 네놈들이다. 사람의 마음은 믿을 수가 없다. 인간은 원래 사욕(私慾) 덩어리지. 믿어서는 안된다." 폭군은 차분하게 중얼거리고 한숨을 쉬었다. "나 역시도 평화를 바라고 있노라만."
  "무엇을 위한 평화냐.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인가?" 이번에는 메로스가 비웃었다. "죄도 없는 사람을 죽여놓고 무엇이 평화냐."
  "닥쳐라. 천한 것." 왕은 훌쩍 고개를 들고 고했다. "입으로는 어떤 깨끗한 말도 할 수 있다. 나는 뱃속의 본심을 꿰뚫어볼 수는 없으니. 네놈이 이제 기둥에 매달리고 나서는 울며 빌어도 듣지 않을것이니라."
  "아, 왕은 약구나. 자만하구나. 나는 이미 죽을 각오다. 결코 목숨을 구걸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하고 말하고, 메로스는 발밑에 시선을 떨어트리고 잠시 망설이고는, "다만, 제게 동정을 베풀 생각이라면, 처형까지 3일간의 기한을 주십시오. 오직 한명의 누이동생에게 남편을 안겨주고 싶습니다. 3일 안에, 저는 마을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하고, 반드시 여기에 돌아오겠습니다."
  "바보같구나."하고 폭군은 쉰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는구나. 놓친 새가 돌아올 것이라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돌아 올 것입니다." 메로스는 필사적으로 주장했다. "저는 약속을 지킵니다. 저를 3일간만 용서해 주십시오. 누이동생이 제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게나 날 믿을 수 없다면, 좋습니다. 이 도시에 세리넨티우스라는 석공이 있습니다. 내 둘도 없는 벗입니다. 그를 인질로 이곳에 두고 가겠습니다. 내가 도망가서 3일째의 일몰까지 여기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 벗을 목졸라 죽이십시오. 부디, 그렇게 해 주십시오."
  그 말을 듣고 왕은 잔학한 기분으로, 슬쩍 웃었다. 건방진 소리를 하는구나. 어차피 돌아오지 않을것이 분명하다. 이 거짓말쟁이에게 속아넘어간 흉내를 내고, 풀어주는 것도 재미있겠다. 그렇게해서 인질이 된 남자를 3일 째에 죽여버리는 것도 고소할 것이다. 사람은 이래서 믿을수가 없구나하고, 나는 슬픈 얼굴을 하고 그 인질이 된 남자를 책형(磔刑)에 처하는 것이다. 세상에 있는 정직자라던가 하는 녀석들에게 한껏 보여주고싶구나.
  "소원을 들어주마. 그 대신할 자를 부르라. 3일째에의 일몰까지 돌아오도록 하라. 늦게 오면 그 인질을 반드시 죽일 것이니라. 조금 늦게 오는 것이 좋을 것이다. 네놈의 죄는 영원히 용서해 주마."
  "무, 무슨 말씀을?"
  "하하. 목숨이 소중하다면 늦게 오라. 네놈의 마음은 알고 있으니라."
  메로스는 분하여 발을 굴렀다. 뭔가 말하고 싶어졌다.
  죽마고우, 세리넨티우스는 늦은 밤, 왕성에 불려갔다. 폭군 디오니스의 면전에서 좋은 벗과 좋은 벗은 2년만에 상봉했다. 메로스는 벗에게 모든 사정을 얘기했다. 세리넨티우스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메로스를 꼭 껴안았다. 벗과 벗의 사이에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세리넨티우스는 묶였다. 메로스는 바로 출발했다. 초여름, 만천의 별이 떴다.
  메로스는 그날 밤 한숨도 자지 않고 10리길을 서두르고 서둘러서, 마을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 오전, 해는 이미 높이 떠서, 마을 사람들은 들에 나갈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메로스의 16살의 누이동생도, 오늘은 오라비를 대신하여 양떼의 번을 섰다. 비틀거리며 걸어온 오라비의 피로곤비(疲労困憊)한 모습을 보고 놀랐다. 그리고는 시끄럽게 오라비에게 질문을 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메로스는 무리해서 웃으려고 노력했다. "도시에 할 일을 남겨놓고 왔다. 다시 곧 가야만 해. 내일 네 결혼식을 올리겠다. 빠른 쪽이 좋겠지."
  누이동생은 볼을 붉혔다.
  "기쁘냐? 예쁜 의상도 사 왔다. 자, 지금부터 가서 마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오너라. 결혼식은 내일이라고."
  메로스는 다시 비틀비틀 걸어서, 집에 돌아와 신들을 모신 제단을 장식하고, 축하연 자리를 준비하고, 순식간에 마루에 쓰러져서 호흡도 못할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눈을 뜬 것은 밤이었다. 메로스는 일어나서 바로 신랑의 집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조금 사정이 있으니 결혼식을 내일 해 달라고 부탁했다. 신랑이 될 양치기는 놀라서 그렇게는 할 수 없다. 이쪽은 아직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았다. 포도가 열릴 계절까지 기다려달라고 했다. 메로스는, 기다릴 수 없다. 부디 내일까지 해 달라고 다시한번 밀어붙였다. 신랑이 될 양치기도 완강했다. 좀처럼 승락해주지를 않았다. 새벽녘까지 의논을 계속한 끝에 겨우 어떻게든 신랑은 달래고 어르고 설득했다. 결혼식은 한낮에 열렸다. 신랑신부가 신들에게 선서를 끝낼 때 쯤, 먹구름이 하늘을 덮고 후드득후드득 비가 오기 시작해서 이윽고 장대비같이 퍼붓게 되었다. 축하연에 참석한 마을사람들은 뭔가 불길한 것을 느꼈지만 그래도 각자 기분을 북돋아서 좁은 집 안에서 찌는듯한 더위도 버티고 쾌활하게 노래하고 손뼉을 쳤다. 메로스도 만면에 환희를 머금고, 잠시동안은 왕과의 그 약속조차도 잊었다. 축연은 밤이 되어 더더욱 어지럽고 화려해져서, 사람들은 바깥의 호우를 전혀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메로스는 평생 이대로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좋은 사람들과 생애동안 살아가고 싶다고 바랐지만, 지금은 자신의 몸은 자신의 것이 아니다. 뜻대로는 되지 않을 일이다. 메로스는 자신에게 채찍질을 하여 마침내 출발을 결의했다. 내일 일몰까지는 아직 충분한 시간이 있다. 잠깐 한숨 자고 나서, 그리고 바로 출발하자고 생각했다. 그 무렵에는 비도 잦아들 것이다. 조금이라도 오래 이 집에서 꾸물거리며 머물고 싶었다. 메로스 정도 되는 사내라도, 역시 미련의 정은 있다.  이 밤, 망연히 환희에 젖어있는듯 한 신부에게 다가가,
  "축하한다. 나는 많이 지쳤으니 좀 실례하고 자고싶구나. 눈을 뜨면 바로 도시로 떠나겠다. 중요한 일이 있어. 내가 없더라도 이제 네게는 착한 남편이 있으니, 결코 쓸쓸하지 않을것이다. 네 오라비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남을 의심하는 것, 그리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너도 그것을 알고 있겠지. 남편과의 사이에 어떤 비밀도 만들어서는 안된다. 네게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 뿐이다. 네 오라비는 상당히 대단한 사내였으니, 너도 그 긍지를 가지고 살도록 해라."
  신부는 꿈꾸는 듯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메로스는 그리고 나서는 신랑의 어깨를 두들겨주며,
  "준비를 못 한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지. 우리 집에 보물이라고 할만한 것은 누이동생과 양 뿐이야. 그 외엔 아무것도 없다. 전부 주마. 하나 더, 메로스의 매제가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주게."
  신랑은 손을 비비며 부끄러워했다. 메로스는 웃으며 마을사람들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축하연 자리를 떠나 양치기용 판잣집에 기어들어가 죽은듯이 깊이 잠들었다.
  눈이 뜨인것은 다음 날 박명(薄明) 즈음이었다. 메로스는 벌떡 일어나, 아뿔싸, 늦잠을 자버렸나? 아니야, 아직은 괜찮다. 지금 바로 출발하면, 약속한 시각까지는 충분하다. 오늘은 꼭 그 왕에게 사람에게 신실함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자. 그리고 웃으며 처형장에 올라가주마. 메로스는 유유히 준비를 시작했다. 비도 꽤 잦아든 것 같은 모양이다. 준비는 끝났다. 그리고 메로스는 양 팔을 크게 휘젓고, 빗속을 화살처럼 달려나갔다.
  나는 오늘밤 주는다. 죽기 위해 달리는 것이다. 인질이 된 친구를 구하기 위해 달리는 거다. 왕의 간악함과 간사함을 깨트리기 위해 달리는거다. 달려야 한다. 그리고 나는 죽는다. 젊을 때에 명예를 지켜라. 안녕이다, 고향이여. 젊은 메로스는 괴로웠다. 몇번인가 멈추어 설 것 같았다. 에잇, 에잇 하고 크게 소리치며 자신을 꾸짖으며 달렸다. 마을을 나와, 들을 가로지르고 숲을 빠져나와 이웃 마을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비도 그치고 해도 높이 떠서 슬슬 더워져왔다. 메로스는 이마의 땀을 주먹으로 닦으며, 여기까지 왔으니 괜찮다. 이제 고향에 대한 미련은 없다. 누이동생과 신랑은 분명 좋은 부부가 될 것이다. 내게는 지금 어떤 걱정도 없다. 곧바로 왕성에 도착하기만 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리 서두를 필요도 없다. 천천히 걷자. 하고 천성적인 낙천성을 되찾아, 좋아하는 노래를 멋진 목소리로 부르기 시작했다. 터벅터벅 걸어서 2리를 가고 3리를 가고, 슬슬 전 이정의 절반에 도달했을 무렵, 생각지도 못한 재난, 메로스의 다리는 퍼뜩 멈췄다. 보라, 앞쪽의 냇물을, 어제 내린 호우로 산의 수원지가 범람해서, 탁류가 도도히 하류로 모여, 맹렬한 기세로 일거에 다리를 파괴하고, 콸콸 울림을 울리는 격류가 다리의 도리를 산산조각으로 날려버렸다. 그는 망연히 멈춰섰다. 이리저리 둘러보고, 또 소리가 닿는 한 불러도 보았지만 묶여있던 배는 남김없이 파도에 쓸려가서 흔적도 없고, 다리지기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흐름은 마침내 부풀어 올라 바다처럼 되었다. 메로스는 냇가에 웅크리고는 격정에 못 이겨 울며 제우스에게 두손을 들고 애원했다. "아아, 진정시켜주시오, 미친듯이 거친 이 물결을! 시간은 속속 흘러가고 있습니다. 태양도 이미 한낮입니다. 저것이 져 버리기 전에, 왕성에 도착하지 못한다면 그 좋은 벗이, 나때문에 죽고 맙니다."
  탁류는 메로스의 외침을 비웃듯이 점점 격렬하게 미친듯이 춤췄다. 파도는 파도를 삼키고, 휘감고, 부추기고, 그렇게 시간은 시시각각 사라져간다. 이제 메로스도 각오했다. 헤엄쳐 넘을 수 밖에 없다. 아아, 신들이여 지켜보소서! 탁류에도 지지 않는 사랑과 신실함의 위대한 힘을, 지금이야말로 발휘해 보이겠다. 메로스는 풍덩 물속에 뛰어들어, 백마리의 이무기처럼 미친듯이 거친 파도를 상대로 필사적인 투쟁을 개시했다. 온 몸의 힘을 팔에 모아서 밀려와서는 소용돌이로 끌어들이는 흐름을, 뭘 이까짓것을 이라는 듯 헤쳐나가고 헤쳐나가며 무턱대고 돌진하는 사자분신의 모습을 신도 불쌍히 여겼는지, 마침내 연민을 베풀어주었다. 밀리고 밀려서, 멋지게 건너편 기슭의 나무 줄기를 붙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감사했다. 메로스는 말처럼 크게 몸을 한번 흔들고 나서, 바로 다시 달렸다. 일각이라도 허비할 수 없다. 태양은 이미 서쪽으로 기울어지려고 한다. 쌕쌕 거친 호흡을 하며 고개를 올라, 오르고 나서 마음을 놓았을 때, 갑자기 눈앞에 한무리의 산적이 뛰쳐나왔다.
  "멈춰라!"
  "무슨 짓이냐. 나는 해가 지기 전에 왕성에 가야만 한다. 비켜라!"
  "어딜, 놓아주지 않겠다. 가진 걸 전부 내놓고 가라."
  "나는 목숨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 단 하나의 목숨도 이제부터 왕에게 주어야 한다."
  "그 목숨이 필요한 것이다."
  "이제보니 왕의 명령으로 여기서 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구나."
  산적들은 아무말도 없이 일제히 곤봉을 휘둘렀다. 메로스는 훌쩍 몸을 굽혀 비조처럼 근처의 한명을 덮쳐 그 곤봉을 뺏었다.
  "안됬지만 정의를 위해서다!"하고 맹렬히 일격, 순식간에 세명을 쓰러트리고, 남은 자들이 기가 꺾인 틈에 재빨리 달려 고개를 내려갔다. 단숨에 고개를 달려내려왔지만, 역시 피로하고, 때마침 오후의 작열하는 태양이 정면으로, 환하게 내리쬐서, 메로스는 몇번이고 현기증을 느끼고, 이래서는 안된다 하고 정신을 차려서는 비틀비틀 두세걸음 걷고는 결국 털썩 무릎을 꿇었다. 일어설 수가 없었다. 하늘을 우러르고는 분해서 울었다. 아아, 아, 탁류를 헤엄쳐나오고, 산적을 셋이나 쓰러트린 달리기꾼, 여기까지 돌파해 온 메로스여. 진정한 용자, 메로스여. 지금 여기서 지쳐 움직일 수 없게 된다면 한심하다. 사랑하는 벗은 널 믿었기에 이윽고 죽어야만 한다. 너는 희대의 믿을 수 없는 인간, 바로 왕이 생각한 대로다 하고 자신을 꾸짖어보지만, 전신이 쇠약해져서 이제는 애벌레만큼도 전진할 수 없다. 길 옆의 풀밭에 벌렁 드러누웠다. 몸이 피로해지면 정신도 함께 당한다. 이제 아무래도 좋다. 용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될대로 되라는 근성이 마음 한구석에 둥지를 틀었다. 나는 이만큼이나 노력했다. 약속을 깰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신도 보아주어서, 나는 힘껏 노력해 온 것이다. 움직일 수 없게 될 때 까지 달려 온 것이다. 나는 믿을 수 없는 무리가 아니다. 아아, 할수만 있다면 내 가슴을 열어젖혀서 진홍의 심장을 보고 싶다. 사랑과 신실함의 혈액만으로 움직이는 이 심장을 보여주고 싶다. 하지만 나는 이 중요한 때에 기력도 끈기도 다해버렸다. 나는 무척이나 불행한 사내다. 나는 분명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나의 일가도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나는 벗을 속였다. 도중에 쓰러지는 것은 처음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아, 이젠 아무래도 좋다. 이것이 나에게 정해진 운명일지도 모른다. 세리넨티우스여, 용서해다오. 너는 언제나 나를 믿었다. 나도 너를 속이지 않았다. 우리는 정말 좋은 벗과 벗이었다. 단 한번이라도 어두운 의혹의 구름을 서로의 가슴에 품은적은 없었다. 지금도 너는 나를 사심없이 기다리고 있을테지. 아아, 기다리고 있을테지. 고맙다, 세리넨티우스. 잘도 나를 믿어주었다. 그것만 생각하면 견딜수가 없다. 벗과 벗 사이의 진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보물이니까. 세리넨티우스, 나는 달렸다. 너를 속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믿어다오! 나는 서두르고 서둘러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탁류를 돌파했다. 산적의 포위에서도 훌쩍 빠져나와 단숨에 고개를 내려온 것이다. 나이기 때문에 할 수 있었다. 아아, 이 이상 나에게 바라지 말아다오. 내버려다오. 아무래도 좋다. 나는 진 것이다. 한심하다. 비웃어다오. 왕은 나에게 조금 늦게 오라고 속삭였다. 늦게 오면 인질을 죽이고 나를 살려주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왕의 비열함을 증오했다. 하지만 이제와서 보니 나는 왕이 말하는 대로 되었다. 나는 늦게 가게 될 것이다. 왕은  지레짐작하여 나를 비웃고, 그리고 아무일도 없이 나를 방면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난 죽는 것보다 괴롭다. 나는 영원히 배신자다. 지상에서 가장 불명예스러운 인종이다. 세리넨티우스여, 나도 죽겠다. 너와 함께 죽게 해다오. 너만은 나를 믿어줄 것이 틀림없다. 아니, 그것도 나의 독선인가? 아아, 이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악덕자(悪徳者)로서 살아남아 줄까. 마을에는 나의 집이 있다. 양도 있다. 누이동생 부부는, 설마 나를 마을에서 쫓아내지는 않을 것이다. 정의니 신실함이니 사랑이니, 생각해보면 하찮다. 남을 죽이고 자신이 살아난다. 그것이 인간세계의 법칙이 아니었던가, 아아, 모든것이 시시하다. 나는 추악한 배신자다. 어떻게 하든지 마음대로 해라. 이젠 끝장이다. ─사지를 내뻗고, 꾸벅꾸벅 잠시 졸고 말았다.
  문득 귀에 졸졸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살짝 고개를 들어 숨을 삼키고 귀를 귀울였다. 바로 발 옆으로, 물이 흐르고 있는 것 같다. 비틀비틀 일어나서 보니, 바위틈에서 펑펑 무언가를 작게 속삭이며 맑은 물이 솟아나오고 있다. 그 샘물에 빨려들어가듯이 메로스는 몸을 구부렸다. 몰을 양손으로 떠서 한모금 마셨다. 휴우하고 긴 한숨을 쉬니 꿈에서 깨어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걸을 수 있다. 가자. 신체의 피로회복과 함께 약간의 희망이 생겨났다. 의무수행의 희망이다. 자신을 죽여서 명예를 지킬 희망이다. 석양은 붉은 빛을 나무의 잎에 던지고, 잎도 가지도 타오를 것 처럼 빛나고 있다. 일몰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다.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조금도 의심치 않고, 조용히 기대해주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나는 믿음을 받고 있다. 내 목숨따위는 문제가 안 된다. 죽어서 사과 같은 적당한 말을 하고 있을순 없다. 나는 신뢰에 보답해야만 한다. 지금은 단지 그것 뿐이다. 달려라! 메로스.
  나는 신뢰받고 있다. 나는 신뢰받고있다. 방금 전의 그 악마의 속삭임은, 그것은 꿈이다. 나쁜 꿈이다. 잊어버려라. 오장이 지쳤을 때는 문득 그런 나쁜 꿈을 꾸는 것이다. 메로스, 네가 부끄러워 할 것이 아니다. 역시 너는 진정한 용자다. 다시 일어나 달릴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감사하다! 나는 정의의 지사(志士)로서 죽을 수 있다. 아아, 해가 진다. 거침없이 진다. 기다려다오, 제우스여. 나는 날 때부터 정직한 사내였다. 정직한 사내인 채 죽게 해 주시오.
  길가는 사람을 젖히고 튕겨내며 메로스는 검은 바람처럼 달렸다. 들판에서 술자리의, 그 잔치의 한가운데를 달려서 빠져나가, 술자리의 사람들을 놀래키고, 개를 걷어차고, 시내를 뛰어넘어, 조금씩 져 가는 태양의 열배나 빠르게 달렸다. 한무리의 여행자와 휙 엇갈린 순간, 불길한 대화를 언뜻 들었다. "지금 쯤은, 그 사내도 기둥에 매달려 있겠지." 아아, 그 사내, 그 사내를 위해서 나는 지금 이렇게나 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 사내를 죽게 해서는 안된다. 서둘러라, 메로스. 늦어서는 안된다. 사랑과 신실함의 힘을, 지금이야말로 알게 해주어야 한다. 차림새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메로스는 이젠 거의 알몸이었다. 호흡도 못 하고, 두번 세번, 입에서 피를 뿜어냈다. 보인다. 저편에 작게, 시라쿠사시의 탑루(塔樓)가 보인다. 탑루는 석양을 받아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아아, 메로스님" 신음하는 듯한 목소리가 바람과 함께 들렸다.
  "누구냐?" 메로스는 달려가면서 물었다.
  "피로스토라토스입니다. 당신의 친구 세리넨티우스님의 제자입니다." 그 젊은 석공도, 메로스의 뒤를 따라 달리면서 외쳤다. "이미 허사입니다. 소용이 없습니다. 달리는 것은 그만둬 주십시오. 이제 그분을 구할 수 없습니다."
  "아니, 아직 해는 지지 않았다."
  "지금 막 그분이 사형당할 참입니다. 아아, 당신은 늦어버렸다. 원망스럽습니다. 아주 약간, 아주 잠깐이라도 빨랐다면!"
  "아니, 아직 해는 지지 않았다." 메로스는 가슴이 찢어질듯한 마음으로, 빨갛고 큰 석양만을 바라보았다. 달릴 수 밖에 없다.
  "그만 둬 주십시오. 달리는 것은 그만 둬 주십시오. 지금은 당신의 목숨이 소중합니다. 그분은 당신을 믿었습니다. 형장에 끌려나가면서도 태연했습니다. 임금님이 실컷 그분을 놀리더라도, 메로스는 옵니다 라고만 답하며, 줄곧 강한 신념을 가지고  계시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니 달리는 것이다. 믿음을 받고 있으니 달리는 것이다. 늦지 않는다. 늦지 않으면 문제 없는 것이다. 사람의 목숨도 문제 없는 것이다. 나는, 무언가 더욱 무섭고 큰 것을 위해서 달리는 것이다. 따라와라! 피로스토라토스."
  "아아, 당신은 미쳤는가. 그렇다면 힘껏 달려야 한다. 혹시라도 늦지 않을지도 모른다. 달리시오."
  말할 것도 없다. 아직 해는 지지 않았다. 최후의 사력을 다해서 메로스는 달렸다. 메로스의 머릿속은 텅 비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커다란 힘에 이끌려 달렸다. 해는 흔들흔들 지평선에 잠기며, 실로 최후의 한 조각의 잔광도 꺼트리려고 하려는 때, 메로스는 질풍처럼 형장에 돌입했다. 늦지 않았다.
  "멈춰라. 그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 메로스가 돌아왔다. 약속대로, 지금 돌아왔다."고 큰 소리로 형장의 군중을 향해 소리칠 생각이었지만, 목이 쉬어서 쉰 목소리가 희미하게 나올 뿐, 군중은 한사람도 그의 도착을 알아채지 못했다. 이미 책형의 기둥이 높이 세우지고, 밧줄에 묶인 세리넨티우스가 서서히 끌어올려지고 있다. 메로스는 그것을 목격하고 최후의 용기로 조금 전에 탁류를 헤엄친 것 처럼 군중을 헤치고, 헤치며,
  "나다! 형리(刑吏)! 죽어야 할 것은 나다. 메로스다. 그를 인질로 삼은 나는 여기에 있다!"하고, 쉰 목소리로 힘껏 외치면서, 마침내 형장에 올라서 끌어올려지는 벗의 양팔에 달라붙었다. 군중은 술렁거렸다. 장하다. 용서하라는 말들이 아우성쳤다. 세리넨티우스는 밧줄에서 풀려났다.
  "세리넨티우스." 메로스는 눈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말햇다. "나를 쳐라. 힘껏 내 뺨을 쳐라. 나는 도중에 한번 나쁜 꿈을 꾸었다. 네가 만약 날 때려주지 않는다면, 난 너와 포옹할 자격조차 없다. 쳐라."
  세리넨티우스는 모든것을 알아챈 모양으로 끄덕이고는, 형장 전체에 울리도록 소리높이 메로스의 오른뺨을 쳤다. 치고 나서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메로스, 나를 쳐라. 똑같은 정도로 소리높이 내 뺨을 쳐라. 나는 이 3일간, 딱 한번 슬쩍 너를 의심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널 의심했다. 네가 나를 때려주지 않는다면, 나는 너와 포옹할 수 없다."
  메로스는 팔을 들먹거리며 세리넨티우스의 뺨을 쳤다.
  "고맙다. 벗이여." 둘은 동시에 말하고, 꽉 껴안고, 그리고는 기뻐서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군중 속에서도 흐느낌이 들렸다. 폭군 디오니스는, 군중의 배후에서 두사람의 모습을 말끄러미 쳐다보았지만, 이윽고 조용히 두사람에게 다가가서, 얼굴을 붉히며 이렇게 말했다.
  "네놈들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네놈들은 내 마음을 이긴 것이다. 신실함이란 결코 공허한 망상이 아니었다. 부디, 나도 한 패로 삼아주지 않겠는가. 부디, 네 소원을 들어서, 네놈들의 동료 한 사람이 되게 해 다오."
  군중 사이에서 한바탕 환성이 일었다.
  "만세, 임금님 만세"
  한사람의 소녀가, 붉은 망토를 메로스에게 바쳤다. 메로스는 허둥지둥거렸다. 좋은 벗은, 그것을 알아채고 가르쳐주었다.
  "메로스, 너는 발가벗고 있지 않은가. 빨리 그 망토를 입도록 해. 이 귀여운 아가씨는, 메로스의 나체를 모두가 보는 것이 견딜 수 없이 분한 것이야."
  용자는, 새빨갛게 얼굴을 물들였다.

(옛 전설과, 실러의 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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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휘바 2014.12.01 20:25 신고

    잘 봤습니다

고쇼가와라(五所川原)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숙모님이 고쇼가와라(五所川原[각주:1])에 사셔서, 어릴 때 자주 고쇼가와라에 놀러갔습니다. 아사히자(旭座[각주:2])의 무대피로공연도 보러 갔습니다. 소학교 3,4학년쯤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토모에몬(友右衞門)이었을 것입니다. 우메노요시베(梅の由兵衛[각주:3])를 보고 울어버렸습니다. 회전무대를 그때 난생 처음 보고 무심결에 일어나버릴 정도로 놀랐습니다. 이 아사히자는, 그후 얼마가지 않아 화재를 일으켜 전소해버렸습니다. 그때의 화염이 카나기(金木[각주:4])에서 똑똑히 보였습니다. 영사실에서 발화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러간 소학생이 10명 정도 소사(焼死)했습니다. 영사기사가 죄를 추궁당했습니다. 과실상해치사(過失傷害致死)라던가 하는 죄명이었습니다. 아이였을때도, 어째서인지 그 기사의 죄명과 운명을 잊을수가 없었습니다. 아사히자라는 글자가 「불(火)」이라는 글자와 관계가 있어서 불탔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20년도 전의 일입니다.

 일곱 살인가 여덟 살 때, 고쇼가와라의 번화한 거리를 걷다가 하수구에 빠졌습니다. 꽤 깊어서, 물이 턱 근처까지 왔습니다. 삼척(3尺:1m 가량)정도 됬을지도 모릅니다. 밤이었습니다. 위에서 남자가 손을 뻗어주어서 그것을 잡았습니다. 끌려올라온 다움 중인환시(衆人環視)리에 알몸이 되어서 정말 곤혹스러웠습니다. 딱 거기가 헌옷방 앞이어서, 그 가게의 헌옷을 바로 입혀졌습니다. 여자아이의 유카타였습니다. 오비[帯]도 녹색의

헤코오비(兵古帯[각주:5])였습니다. 굉장히 부끄러웠습니다. 숙모님이 안색을 바꾸고 튀어오셨습니다.
저는 숙모님께 사랑받으면서 컸습니다. 저는 남자답지가 못해서 뭔가 남에게 놀림을 받아서, 혼자서 비뚤어져 있었습니다만, 숙모님만은 저를 멋진 남자라고 말해 주셨습니다. 다른 사람이 제 기량을 나쁘게 말하면 속모님은 진심으로 화를 내셨습니다. 모두 아득한 추억이 되었습니다.


http://www.aozora.gr.jp/cards/000035/card45688.html
  1. 아오모리현에 위치한 시 [본문으로]
  2. 아마도 극장? [본문으로]
  3. 가부키에 등장하는 협객 [본문으로]
  4. 아오모리현에 위치한 마치 [본문으로]
  5. 어린이용으로, 한폭 넓이의 천을 적당한 길이로 자른 오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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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보전진이보퇴각(一歩前進二歩退却)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일본뿐만이 아닌 것 같다. 또, 문학뿐만이 아닌 것 같다. 작품의 재미보다도 그 작가의 태도가 우선 마음에 걸린다. 그 작가의 인간성을, 약함을 알아내지 않으면 용서가 안된다. 작품을, 작가에게서 떨어진 서명 없는 한개의 생물로서 독립시켜 주지를 않는다. '세 자매'를 읽으면서도, 그 세 젊은 여자의 그늘에, 씁쓸하게 웃고 있는 체호프의 얼굴을 의식한다. 이 감상 방식은, 머리가 좋은 것이고 날카로운 것이다. 안력(眼力)이 종이를 꿰뚫어본다고 하니 대단하다. 혼자 좋아한다. 날카로움이라든지, 창백함이라든지, 얼마나 무른 통속적인 개념인지 알아야만 한다.

  불쌍한 것은 작가다. 무심코 크게 웃을 수 없게 되었다. 작품을 정신수양의 교과서로서 취급당하면 견딜수가 없다. 외잡(猥雑)한 것을 이야기해도 그 화자가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그것은 진지한 이야기가 된다. 웃으면서 엄숙한 것을 이야기해도, 그것은 웃으면서 이야기하니 바보같은 거짓말이다. 이상하다. 내가 밤늦게 지나가던 경찰에게 불려서, 여러가지를 물어보니까 좀 높은 목소리로, 저는, 저는 무엇무엇입니다, 하고 군대식 말로 대답하니까 태도가 좋다는 칭찬을 들었다.

  작가는 점점 갑갑해진다. 어쨌든, 안광이 종이를 꿰뚫는 독자만 상대를 하니까, 깜빡깜빡 할수가 없다. 너무 긴장해서 결국 책상 앞에 정좌한 채로, 그대로 침묵은 금이라는 격언을 끝없이 긍정하는, 그런 가엾은 작가가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

  겸양을 작가에게만 요구하고, 작가는 대단히 죄송히 여기고, 비굴할 정도로 자기를 낮추고, 그렇게 해서 독자는 주인이 된다. 작가의 사생활을 바닥의 바닥까지 벗겨내려고 한다. 실례다. 싸게 파는 것은 작품이다. 작가라는 인간까지 팔지는 않는다. 겸양은, 독자에게야 말로 이것을 요구하고 싶다.
  작가와 독자는 다시 한번 아주 새롭게 영토 분할 협정을 다시 할 필요가 있다.
  가장 고급한 독서의 방식은, 오가이(鷗外[각주:1])든 지드[각주:2]든 오자키 카즈오(尾崎 一雄[각주:3])든, 솔직하게 읽고, 그렇게 해서 충분히 즐기고, 다 읽으면 선선히 헌책방에 가져가서, 이번엔 루이코(涙香[각주:4])의 사미인(死美人)과 교환해 와서, 또 두근거리면서 탐독하는 것이다. 무엇을 읽을지는 독자의 권리이다. 의무가 아니다. 그것은 자유롭게해야 당연한 것이다.

http://www.aozora.gr.jp/cards/000035/card1593.html
  1. 모리 오가이(森 鷗外), 1862-1922, 일본의 소설가, 평론가, 번역가 등 [본문으로]
  2. 아마도 앙드레 지드(Andre Gide), 1869-1951, 프랑스의 소설가, 비평가 [본문으로]
  3. 1899-1983, 일본의 작가 [본문으로]
  4. 쿠로이와 루이코(黒岩 涙香),1862-1920, 일본의 작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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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列車)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1925년에 우메바치(梅鉢)공장이라는 곳에서 제조된 C51형의 그 기관차는, 같은 공장에서 같은 무렵 제작된 삼등객차 3량(輛)과, 식당차, 이등객차, 이등침대차 각각 한량씩과, 그 외에 우편이나 짐같은 화물차 3량해서 합계 아홉개의 상자와, 대충 200명쯤 되는 여객(旅客)과 10만을 넘는 통신(通信)과 거기에 얽힌 수많은 가슴아픈 이야기를 싣고, 비오는 날도 바람부는 날도 오후 두시 반이 되면 피스톤을 울려가면서 우에노(上野)에서 아오모리(青森)를 향해 달렸다. 때때로 만세(万歳)의 규환(叫喚)을 받거나, 손수건으로 이별을 아쉬움을 받거나, 또는 오열(嗚咽)로 불길한 전별을 받는 것이다. 열차번호는 103.

  번호부터 기분이 나쁘다. 1925년부터 지금까지, 8년이나 지났지만 그 사이에 이 열차는 수만명의 애정을 갈라놓았다는 것인가? 실제로 내가 이 열차 때문에 대단히 심한 꼴을 맞았다.

  바로 작년 겨울. 시오타(汐田)가 테츠(テツ)씨를 고향에 되돌려보냈을 때의 일이다.

  테츠씨와 시오타는 같은 고향에서 어릴 때부터 알았던 사이라는 듯하고, 나도 시오타와 고등학교의 기숙사에서 한방에서 자고깨고 한 관계라서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이 연애이야기를 들었다. 테츠씨는 빈곤한 집안의 딸이기 때문에, 좀 유복한 시오타의 집에서는 둘의 결혼은 허락해주지 않아서, 그때문에 시오타는 그의 아버지와 몇번이나 가열찬 말다툼을 했다. 그 최초의 싸움 때, 시오타는 졸도할 것 같이 흥분해서, 결국 방울방울 코피를 흘렸다고 하는데, 그런 우직한 삽화(挿話)조차 나이어린 나의 가슴을 이상하게도 두근거리게 했다.

  그러던 중에 나도 시오타도 고등학교를 나와서, 함께 도쿄의 대학에 들어갔다. 그리고 3년 지났다. 이 기간은, 나에게 있어서는 곤란한 세월이었지만, 시오타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듯, 매일을 태평스럽게 지내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처음 얻은 집이 대학의 바로 옆이었기 때문에, 시오타는 입학 당시에야 정말 2,3회 들려 주었지만, 환경도 사상도 소리를 내가면서 이반(離叛)해 가는 둘에게는, 이전처럼 격의 없는 우정은 도저히 바랄 수 없었던 것이다. 내 비뚤어진 생각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혹시 그때 테츠씨의 상경만 없었더라면, 시오타는 분명 영원히 나와 소원해져버릴 작정이었던 것 같다.

  시오타는 나와 사이좋은 교섭을 끊고서부터 3년째의 겨울에, 갑자기 내 교외의 집을 찾아와서 테츠씨의 상경을 알렸다. 테츠씨는 시오타의 졸업을 애타게 기다리다가 혼자서 도쿄로 도망쳐 왔다고 한다.

  그 무렵 나는 어느 무학(無學)의 시골여자와 결혼했었고, 이제와서 시오타의 그 일에 가슴을 두근거리는 등의 그런 젊어진 기분을 차츰 잃어가고 있던 때였기 때문에, 시오타의 느닷없는 내방(来訪)에 약간 허둥대기는 했지만, 그의 그 방문의 저의를 꿰뚫어보는 일을 잊지 않았다. 그런 한 소녀의 출분(出奔)을 지기(知己) 사이에 퍼뜨리는 것이, 그의 자존심을 얼마나 만족시켰는가? 나는 그의 기쁨을 불유쾌하게 느꼈고, 그의 테츠씨에 대한 진실을 의심하기조차 했다. 내 이 의혹은 무참하게도 적중했다. 그는 나에게 한동안 광희(狂喜)하고 감격하여보인 끝에, 미간에 주름을 모으고, 어찌하면 좋을까? 하는 상담을 작은 목소리로 꺼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미 그런 한가한 유희(遊戯)에는 동정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네도 약아졌군. 자네가 테츠씨에게 옛날만큼의 사랑을 느낄 수 없었다면, 해어질 수 밖에 없겠지. 하고 시오타가 기대하는 대로 솔직히 말해 주었다. 시오타는, 입아귀를 생생하게 미소를 머금고, 하지만, 하고 생각에 잠겼다.

  그로부터 4,5일 지나서 나는 시오타에게 속달우편(速達郵便)을 받았다. 그 엽서에는, 친구들의 충고도 있어서, 서로의 장래를 위해 테츠씨를 고향에 돌려보낸다. 내일 2시 반에 기차로 돌아갈 예정이다. 라는 의미의 내용이 간단히 적혀 있었다. 나는 부탁받지도 않았는데, 테츠씨를 배웅해줘야겠다고 즉시 각오를 굳혔다. 나에게는 그런 경솔한 짓을 쉬이 하는 슬픈 습성이 있었다.

  다음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나는 머뭇거리는 아내를 독촉해서, 함께 우에노역으로 나갔다.

  103호의 그 열차는, 차가운 빗속에서 검은 연기를 뿜어내면서 발차시각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열차의 창문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찾으며 걸었다. 테츠씨는 기관차의 바로 다음 삼등객차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3,4년 전에 시오타의 소개로 한번 만난 적이 있었지만, 그때와 비교해서 보면 얼굴 색이 꽤 하얘졌고, 턱 근처도 볼록하게 쪄 있었다. 테츠씨도 내 얼굴을 잊지 않아 주어서, 바로 열차의 창에서 반신을 내밀고 기쁜듯이 인사를 돌려주었다. 나는 테츠씨에게 아내를 소개해주었다. 내가 일부러 아내를 데려온 것은 아내도 또 테츠씨처럼 빈궁하게 자란 여자이기 때문에, 테츠씨를 위로하는데도 나같은 것 보다 분명 뭔가 적절한 태도나 언사를 취할 것이 틀림없을 것이라는 독단에서였다. 하지만, 나는 보기좋게 배신당했다. 테츠씨와 아내는, 서로 귀부인처럼 인사를 말없이 나눴을 뿐이었다. 나는 어색한 기분이 들어 무슨 부호였는지 객차의 옆에 하얀 페인트로 작게써져있는 스하후(スハフ) 134273이라는 문자 옆을 탁탁 하고 우산대로 쳤다.

  테츠씨와 아내는 날씨에 대해서 두세마디 이야기했다. 그 대화가 끝나버리자, 모두는 마침내 할 것이 없어졌다. 테츠씨는, 창가에 조심스럽게 놓아 두었던 두꺼운 열손가락을 마구 굽히거나 늘리거나 하면서, 한 곳을 줄곧 보고 있었다. 나는 그러한 광경을 보고있을수가 없어서, 테츠씨가 있던 곳에서 살짝 떨어져서, 긴 플랫폼을 어슬렁거렸다. 열차의 아래에서 뿜어진 스팀이 차가운 김이 되어 새하얗게 내 발치를 맴돌았다.

  나는 전기시계 근처에 서서, 열차를 바라보았다. 열차는 비로 완전히 젖어서, 검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3량째의 삼등객차의 창에서, 힘껏 목을 빼고 5,6명의 전송해 주는 사람들에게 떨면서 인사를 하는 검푸른 얼굴이 하나 보였다. 그 무렵 일본에서는 다른 어느 나라와 전쟁을 시작했었는데, 그것에 동원된 병사일 것이다. 나는 봐서는 안될 것을 본 듯한 기분이 들어서, 질식할 것 같이 가슴이 답답해졌다.

  수년 전 나는 어느 사상단체에 약간이지만 관계가 있어서, 이후 얼마 안되어 볼품없는 변명을 하고 그 단체와 헤어져버렸는데, 지금 이렇게 병사를 눈앞에서 응시하면서, 또 창피를 당하고 더럽혀져서 귀향하는 테츠씨를 바라보면서는, 나는 그런 변명이 통할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머리 위의 전기시계를 올려보았다. 발차까지 아직 3분 정도 남아 있었다. 나는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전송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이 발차 전의 3분간 정도로 난처한 것은 없다. 말해야 할 것은 남김없이 다 말했고, 단지 허무하게 얼굴을 보고 있을 뿐이다. 하물며 지금 이 경우, 나는 그 해야 할 말조차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지 않은가. 아내가 더 재능이 있는 여자였다면, 나는 그래도 홀가분했겠지만, 보라. 아내는 테츠씨의 옆에 있으면서도 샐쭉해진듯한 얼굴을 하고 아까부터 입을 다물고 그저 서있기만 하고 있다. 나는 과감히 테츠씨의 창 쪽으로 걸어갔다.

  발차가 임박했다. 열차는 450마일의 노정을 앞에 두고 준비를 취하고, 플랫폼은 술렁거렸다. 내 가슴에는, 이미 남의 처지까지 생각해줄만한 그런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테츠씨를 위로하는데 '재난(災難)'이라는 무책임한 말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아둔한 아내는 열차의 옆벽에 걸린 푸른 철판의, 물방울이 가득 맺힌 문자를 요새 막 배운 어설픈 지식으로, FOR A-O-MO-RI 하고 낮게 읽었던 것이다.

 

http://www.aozora.gr.jp/cards/000035/card31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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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당에 대하여(徒党について)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도당(徒党)은 정치이다. 그리고 정치는 힘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도당도 힘이라는 목표를 위하여 발명된 기관(機関)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 힘이 매달릴 구명줄로 삼는 것은 역시 '다수(多数)'라는 것에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정치의 경우에 있어서는 2백표 보다도 3백표가 절대적인, 거의 신의 심판 앞에 있는 것같은 승리가 되겠지만, 문학의 경우에 있어서는 조금 다른 것 처럼 생각된다

 

  고고(孤高). 그것은 옛날부터 서툰 아첨의 말로서 오랫동안 쓰였고, 그 말을 받은 사람에게 눈을 돌려보면, 단지 싫은 사람으로, 누구라도 그 사람과 교제하는 것은 거절, 그러한 기질의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그리고, 그 소위 '고고'한 사람은, 몹시 입을 일그러뜨리고 '무리[群]'를 매도한다. 왜, 어째서 매도하는지 알수가 없다. 단지 '무리'를 매도하고, 자신들의 소위 '고고'를 뽐내는 것이, 옛날에는 외국에도 일본에도 모든 훌륭한 사람들이 '고고'했다는 전설에 편승하여, 그것으로써 자신의 구차함을 속이려고 하는 것같이도 생각된다.

  '고고'라고 스스로 칭하는 자에게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속임수이다. 거의 예외없이, '간파당한 타르튀프(Tartuffe[각주:1])'이다. 애당초 이 세상에 '고고'라는 것은 없다. 고독이라는 것은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오히려 '고저(孤低)'한 사람이야말로 많은 것 같다.

 

  내 현재의 입장을 말한다면, 나는, 좋은 친구를 몹시 원하지만, 누구도 나와 놀아주지 않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고저'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사실 그것도 거짓말이고, 나는 내 나름대로 '도당'의 괴로움을 예감할 수 있었고, 오히려 '고저'를 고르는 쪽이, 그것 역시 결코 괜찮은 건 아니지만, 오히려 그 쪽에 사는 쪽이 속이 편하다고 생각하여, 구태여 친우교환(親友交歓)을 하지 않을 뿐인 것이다.

 

  그래서 또 '도당'에 대해서 좀 얘기해 보고 싶은데, 내게 있어서(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다) 가장 괴로운 것은 '도당'의 일당의 바보같은 자들을 바보같다고 하지 못하고, 오히려 칭찬을 보내야만 하는 의무를 부담하는 것이다. '도당'이라는 것은, 옆에서 보면 소위 '우정(友情)'에 의해 연결되고, 뭉뚱그려 취급하여, 라고 말해서 미안하지만, 응원단의 박수처럼, 정말로 후련하게 보조(歩調)니 어조(口調)니 하는것이 맞춰져 있는 것 같지만, 실은 가장 증오하는 것은, 그러한 '도당'안에 있는 인간인 것이다. 오히려, 내심 의지하는 인간은 자신의 '도당'의 적수 안에 있는 법이다.

 

  자신의 '도당'안에 있는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만큼 처리하기 곤란한 것은 없다. 그것은 일생 자신을 우울하게 하는 씨앗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새로운 도당의 형식, 그것은 동료들 서로가 떳떳하게 배신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할지도 모른다.

 

  우정. 신뢰. 나는, 그것을 '도당'안에서 본 적이 없다.

 

 

http://www.aozora.gr.jp/cards/000035/card1605.html

  1. 몰리에르(Molière)가 지은 프랑스 희극. 원제는 Tartuffe ou l'Imposteur(타르튀프 혹은 사기꾼). 종교적 위선을 비판·풍자하는 내용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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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재미(小説の面白さ)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소설이라는 것은, 본래 여자나 아이들이 읽는 것으로 이른바 영리한 어른이 필사적으로 읽고, 게다가 그 독후감을 탁자를 쳐가면서 토론하는 것 같은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 소설을 읽고 정신을 차렸다던가 고개를 숙였다던가 하는 사람은 그것이 농담이라면 또 재미있는 이야기이기라도 하겠습니다만, 사실 그러한 행동을 하신다면, 그것은 광인(狂人)의 행동으로 보아야만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가정에 있어서도 아내가 소설을 읽고, 남편이 일하러 나가기 전에 거울을 보고 넥타이를 매면서 요새 어떤 소설이 재미있나 하고 묻고, 아내가 답하기를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가 재미있었어요. 남편, 조끼의 단추를 채우면서, 어떤 줄거리인데 하고, 바보취급하는듯한 어조로 묻는다. 아내, 갑작스레 들떠서 그 줄거리를 자세히 얘기하고, 자신의 설명에 감격하여 흐느껴 운다. 남편, 겉옷을 입고, 흠, 그건 재밌어 보이는군. 그리고 그 일이 있는 남편은 일하러 나가서, 밤에는 어느 살롱에 출석하여 말하기를, 요즘의 소설이라면 역시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가 최고라는 것 같더군요.

  소설이라는 것은, 그렇게 딱한 것이라, 실은 부녀자를 속인다면 그걸로 대성공. 그 부녀자를 속이는 수법도 여러가지 있어서, 어쩔때는 근엄하게 꾸미고, 어쩔때는 미모를 넌지시 비추고, 어쩔때는 명문 출신이라고 속이고, 어쩔때는 시시한 학식을 총점검하여 자랑하고, 어떨때는 자기 집의 불행을 부끄러움도 체면도 부끄러움도 없이 발표하고, 비슷하게 부인(婦人)의 심퍼시를 사려고 하는 의도 명명백백함에도 불구하고, 평론가라는 바보들이 있어서, 그것을 숭배하고, 또 자신의 밥벌이로 삼고 있는 듯 하니까,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말해 둡니다만, 옛날, 타키자와 바킨(滝沢馬琴[각주:1])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쓴 것은 그리 재밌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 사람의 필생의 작품이라는 사토미학켄덴(里見八犬伝[각주:2])의 서문에, 부녀자의 졸음을 쫓기용으로라도 쓰인다면 다행이다 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그 부녀자의 졸음쫓기용을 위해서, 그 사람은 눈이 멀어버렸고, 그래도 구술필기로 계속했으니, 바보같지 않습니까?

  여담같이 되어버렸습니다만, 저는 언젠가 토손(藤村[각주:3])이라는 사람의 해뜨기 전[夜明け前]이라는 작품을, 잠들지 못하는 밤에 아침까지 전부 다 읽고, 그러고 나니 졸려왔기 때문에, 그 두꺼운 책을 머리맡에 던지고, 꾸벅꾸벅 졸면서 꿈을 꿨습니다. 그것이, 조금도, 아무것도, 전혀 그 작품과 관계가 없는 꿈이었습니다. 나중에 듣기를, 그 사람이 그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10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http://www.aozora.gr.jp/cards/000035/card1604.html

  1. 쿄쿠테 바킨(曲亭馬琴), 1767~1848, 에도시대 후기의 극작가 [본문으로]
  2. 난소 사토미학켄덴(南総里見八犬伝) [본문으로]
  3. 시마자키 토손(島崎藤村), 1872~1943, 일본의 시인, 소설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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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군의 죽음(織田君の死)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오다군[각주:1]은 죽을 각오였다. 나는 오다군의 단편소설을 두 편 통독한 것 뿐이고, 또 만난 것도 두번. 그것도 바로 한달 정도 전에, 처음으로 만났을 뿐으로, 각별히 깊은 교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다군의 슬픔을,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보다도 훨씬 깊이 감지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처음 그와 긴자에서 만나, '어쩌면 이렇게 슬픈 남자인가' 하고 생각하여, 나도 괴로워서 어쩔수가 없었다. 그가 가는 길에는, 죽음의 벽 이외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 선명히 보이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녀석은 죽을 각오를 하고 있다. 하지만, 내게는 어찌 할 도리가 없다. 선배다운 충고따윈 기분나쁜 위선이다. 단지 보고 있을 수 밖에 없다.

  죽을 각오로 글을 써대던 남자. 그것은 지금 이 시대에 더욱 더 많이 있어야 당연한 것 처럼 내게는 느껴졌다. 하지만 의외로 발견되지 않는다. 정말 시시한 시대다.

  세간의 어른들은, 오다군의 죽음에 대해서 자중(自重)이 부족했다던가 뭐라던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비판을 내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파렴치한 일은 더이상 말하지 말라!

  어제 읽은 타츠노(辰野[각주:2])씨의 세낭쿠르(Senancour[각주:3])의 소개문 안에, 다음과 같은 세낭쿠르의 말이 수록되어 있었다.

  "삶을 버리고 도망치는 것을 죄악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하지만 나에게 죽음을 금하는 그 똑같은 궤변가가 가끔은 나를 죽음 앞으로 내보내거나, 죽음을 향하게 하는 것이다. 그들이 생각해 내는 여러가지 혁신은 내 주위에 죽음의 기회를 늘리고, 그들이 말하는 것은 나를 죽음으로 이끌고, 또 그들이 정하는 법률은 나에게 죽음을 내린다."

  오다군을 죽인건, 네놈이 아닌가.

  그의 이번 급서(急逝)는, 그의 슬픈 최후의 항의(抗議)의 시(詩)였다.

  오다군! 자네는 아주 잘 했다.


http://www.aozora.gr.jp/cards/000035/card42365.html

  1. 오다 사쿠노스케(織田作之助)를 말함. 1913~1947. 일본의 소설가. [본문으로]
  2. 타츠노 유타카(辰野隆), 1888~1964, 프랑스 문학자 [본문으로]
  3. 에티엔느 피베르 드 세낭쿠르(Etienne Pivert de Senancour),1770~1846, 프랑스의 작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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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海)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도쿄 미타카(三鷹[각주:1])의 집에 있을 무렵에는, 매일처럼 근처에 폭탄이 떨어져서, 나는 죽어도 상관 없는데, 하지만 내 아이의 머리 위에 폭탄이 떨어지면 결국 바다라는 것을 한번도 못 보고 죽어버릴 것이라고 생각하니 괴로운 기분이 들었다. 나는 츠가루(津軽[각주:2]) 평야의 한가운데서 태어났기 때문에, 바다를 본 것이 늦어서, 10세쯤에 처음으로 바다를 보았다. 그리고 그때의 대흥분은 지금도 내 가장 귀중한 추억 중 하나이다. 이 아이에게도 한번 바다를 보여주고 싶다.

  아이는 여자아이로 5살이다. 얼마 안 있어 미타카의 집은 폭탄으로 부서졌지만, 집의 사람들은 아무도 상처를 입지 않았다. 우리는 아내의 고향인 코후(甲府[각주:3])시로 옮겨갔다. 하지만 곧바로 코후시도 적기에게 습격당해, 우리가 있던 집은 전소(全燒)했다. 하지만 싸움은 여전히 계속된다. 결국 내가 태어난 토지로 처자를 데려갈 수 밖에 없다. 거기가 마지막으로 죽어야 할 곳이다. 우리는 코후에서 츠가루의 생가를 향해 출발했다. 3일밤낮 걸려, 겨우 아키타(秋田)현 히가시노시로(東能代)까지 이르러서, 거기서 고노센(五能線[각주:4])로 갈아타고 약간 마음을 놓았다.

 "바다는, 바다가 보이는 쪽은, 이쪽입니다."

  나는 일단 차장에게 물었다. 이 노선은 바다의 바로 옆을 통과한다. 우리는 바다가 보이는 쪽에 앉았다.

  "바다가 보인단다. 곧 보일거야. 우라시마 타로(浦島太郎[각주:5])씨의 바다가 보일거야."

  나 혼자 어쩌고 저쩌고 떠들고 있다.

  "자! 바다다. 보렴. 바다야. 아아, 바다다. 어떠니, 크지? 자, 바다야."

  드디어 이 아이에게도 바다를 보여줄 수 있게 된 것이다.

  "강이네, 엄마." 하고 아이는 태연하다.

  "강?" 나는 깜짝 놀란다.

  "어, 강." 아내는 반쯤 자는 채로 대답한다.

  "강이 아냐. 바다야. 애당초, 아예 다르잖아! 강이라니, 너무하잖아."

  실로 시시한 생각으로, 나 혼자, 황혼의 바다를 바라본다.

 

http://www.aozora.gr.jp/cards/000035/card42363.html

  1. 도쿄도 서부의 시(市) [본문으로]
  2. 아오모리(靑森)현 서반부(西半部)의 호칭 [본문으로]
  3. 야마나시(山梨)현 중부에 위치한 시 [본문으로]
  4. 아키타현 노시로(能代)시의 히가시노시로역과 아오모리현 미나미츠가루(南津軽)군 이나카다테무라(田舎館村) 카와베(川部)역을 잇는 일본의 철도노선 [본문으로]
  5. 일본의 설화속 인물, 거북이를 구해주고 절대 열지 말라는 상자를 얻은 주인공이 결국 상자를 열어 노인이 되었다고 함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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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春)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벌써 37세가 되었습니다. 일전에 어떤 선배가,  뭐어, 넌 참 용캐 살아 왔구만. 하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저 자신도 서른 일곱까지 살아 온 것이 거짓말 처럼 여겨지는 일이 있습니다. 전쟁 덕분에 겨우 살아나갈 힘을 얻은 듯 합니다. 이미 아이가 둘 있습니다. 위가 여자아이고, 올해 다섯살이 됩니다. 아래는 남자아이로, 얘는 작년 8월에 태어나, 아직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적기가 습격했을 때에는, 아이가 아래쪽의 남자아이를 업고, 나는 위쪽의 여자아이를 안고, 방공호로 뛰어들었습니다. 전날에 갑작스레 적기가 강하해 와서, 바로 근처에 폭탄을 떨어트려서, 방공호에 뛰어들 틈도 없이 가족은 둘로 나뉘어 벽장에 기어들어갔습니다만, 쨍강 하고 물건이 부서지는 소리가 나서, 위쪽의 여자아이가, 와아, 유리창이 깨졌어 하고, 공포도 뭣도 느끼지 않는 모습으로 천진하게 떠들고, 적기가 가고 나서 소리가 난 쪽으로 가 보니 역시 3첩방[三畳間[각주:1]]의 창유리가 한장 깨져 있었습니다. 저는 묵묵히 주저앉아 유리 파편을 주워모았습니다만, 그 손끝이 흔들려서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한시라도 빠르게 수리하고 싶어서, 아직 공습경보가 해제되지 않았는데 기름종이를 잘라서 부서진 흔적에 붙였습니다만, 더러운 뒷쪽을 바깥쪽으로 향하게 하고, 깨끗한 쪽을 안쪽을 향하게 하여 붙였기 때문에 아내는 얼굴을 찌푸리고 제가 나중에 할 거에요. 반대로 했어요. 그거. 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다시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소개(疎開)를 해야만 했지만, 여러 사정으로, 그리고 남편으로서의 금전 사정으로 우물쭈물 하다보니 이미 봄이 왔습니다.

  올해의 도쿄의 봄은, 북국(北國)의 봄과 굉장히 닮았습니다.

  눈이 녹으면서 내는 물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리기 때문입니다. 위쪽의 여자아이는 자꾸 버선을 벗어버리려고 합니다.

  올해의 도쿄의 눈은, 40년만의 대설이라고 하더군요. 제가 도쿄에 오고나서, 벌써 거의 15년 정도 됩니다만, 이런 대설을 겪은 기억은 없습니다.

  눈이 녹는 것과 동시에, 꽃이 피기시작하다니 마치 북국의 봄과 같군요. 앉아서 고향으로 소개(疎開)한듯한 기분이 될 수 있는 것도 이 대설 덕분입니다.

  지금, 위쪽의 여자아이가 맨발에 게다를 신고 눈이 녹는 길을, 어머니를 따라 공중목욕탕에 갔습니다.

  오늘은 공습이 없는 모양입니다.

  출정하는 어린 친구의 깃발에, 남아필생위기일발(男兒畢生危機一髪)이라고 써 주었습니다.

  망, 한, 함께 아슬아슬.(忙、閑、ともに間一髪)

  http://www.aozora.gr.jp/cards/000035/card24449.html

  1. 1.5평 정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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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지 약속(一つの約束)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난파하여, 내 몸은 노도(怒濤)에 휩쓸리고, 해안에 내동댕이쳐지고, 필사적으로 붙든 곳은 등대의 창가이다. 아, 기쁘다, 도움을 구하며 외치려고 하여 창 안을 보니, 방금 등대지기 부부와 어린 여자아이가 검소하지만 행복한 저녁식사 도중이다. 아아, 안되지. 하고 생각했다. 내 처참한 일성(一聲)으로 이 단란(團欒)이 엉망진창이 된다고 생각하니 목까지 올라온 '도와줘!'의 소리가 아주 잠깐 망설여 졌다. 아주 잠깐이다. 순식간에 철썩 하고 큰 파도가 밀려와, 그 내성적인 조난자의 몸을 한입에 삼켜 바다 멀리 납치해 사라졌다.

  이미 살아날 도리는 없다.

  이 조난자의 아름다운 행위를 대체 누가 봤을 것인가. 아무도 보지 않았다. 등대지기는 아무것도 모르고 일가단란(一家團欒)한 식사를 계속했을 것이 틀림 없고, 조난자는 노도에 밀려가 (어쩌면 눈보라 치는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혼자서 죽어간 것이다. 달도 별도 그것을 보지 않았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행위는 엄연한 사실로서 이야기되고 있다.

    바꿔 말하면, 이것은 작가의 하룻밤의 환상을 단초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이 미담은 결코 거짓이 아니다. 확실히 그런 사실이 이 세상에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작가의 환상의 신비함이 존재한다. 사실은 소설보다도 신기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무도 보지 못한 사실 역시 세상에는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실이야말로 고귀한 보옥(寶玉)으로서 빛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야말로 쓰고싶다는 것이 작가의 삶의 보람이 된다.

  제일선(第一線)에서 싸우고 있는 제군. 뜻을 편히 가져달라.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어느 날, 어느 한 구석에서 제군의 아름다운 행위는 반드시 한무리의 작가들에 의해 실수없이, 남김없이, 대대손손 전해질 것이다. 일본 문학의 역사는 3천년간 그것을 해 왔고, 앞으로도 또한 변함없이 그 전통을 계승한다.

 

http://www.aozora.gr.jp/cards/000035/card4306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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