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다 토라히코 - 길가의 풀(路傍の草)

테라다 토라히코(寺田 寅彦)


  1. 차상車上 

'삼상三上'이라는 말이 있다. 침상枕上 안상鞍上 측상厠上을 합쳐서 삼상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괜찮은 생각을 발효시키는데 적합한 세 가지 환경'을 대립시킨 것이라고도 해석된다. 제법 그럴듯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옛날 중국인들이나 굉장히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면 현대에서는 저 말대로 적용하기는 어렵다.

삼상을 삼상이게끔 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우선 이 세 가지 환경은 모두 육체적으로는 부자유하게 구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삼상에 있는 동안 우리는 다른 일을 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하지만 또 다른 면에서 보면 대단히 자유롭고 해방된 고마운 환경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상황이라면 바깥에서 여러 가지 일이 들어올 걱정에서 면제되기 때문이다. 육체가 속박당하는 대신에 정신이 해방된다. 두뇌의 활동이 바깥쪽으로 향하는 것이 멈추므로 자연스레 안쪽으로 향하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현대 일반인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이 삼상은 다소 변경할 필요가 있다. 일단 '침상'을 보면, 매일매일 일에 쫓기고 밤늦게까지 일에 시달리다가 겨우 잠자리에 누운 많은 사람에게는 침상은 자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저러고도 잠들지 못하는 경우는 병이 있는 것이므로, 제대로 된 생각은 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측상'은 사람에 따라서는 현재도 적용될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도 아마 그런 것 같을 정도로 장시간 이 환경에 안주하는 사람은 있다. 하지만 늦잠을 자서 출근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급히 용무를 보는 습관이 있는 사람이라면, 여기도 또한 명상에 적합한 환경은 아니다.

마지막 하나인 '안상'은 우리와는 좀 연이 없다. 이것을 대신할만한 인력거나 자동차도 최소한 도쿄 시내에서는 침착한 기분이 되는 데는 그리 적절하지 않은 듯하다. 자가용이 있는 상황이라면 모르지만, 자가용이 없는 사람에게는 단 하나 남은 문제가 전철의 '차상車上'이다.

전철 안에서는 평범한 의미의 한적함은 맛볼 수 없다. 하지만 그 대신 극도의 혼잡함에서 오는 자포자기적 침착함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없는 것도 아니다. 승객은 모두 돌멩이고 자신도 그중의 한 돌멩이가 되어 주변 돌멩이의 속박에 체념하는 부분에 절로 '삼상'의 환경과 서로 통하는 부분이 발생한다. 따라서 만원 전철 안은 의외로 명상에 적합하다. 책상 앞이나 실험실에서는 떠오르지 않는 좋은 아이디어가 전철 안에서 불현듯 떠오르는 경우를 자주 경험한다.

'삼상'을 삼상이게끔 하는 요소에는 육체의 구속에서 오는 정신의 해방 외에도 한가지 요건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적당한 감각적 자극이다. 안상이나 측상의 경우에는 이것이 명백하지만 침상의 경우에는 이것이 명백하지는 않은 듯 보인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베개나 침대의 감촉 외에도 눕기 때문에 전신의 혈압분포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실로 이것에 걸맞은 듯하다. 문제의 '차상'의 경우에는 이 조건이 충분히 만족되어 있음은 명백하다. 다만 오히려 자극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병약하거나 익숙하지 않다면 '차상'의 효력은 발생하기 힘들다. 이 자극에 적당히 마비된 사람이 가장 '차상'의 효율을 올릴 수 있을 듯하다.

 

2. 탁상연설

최근 여러 종류의 연회에서 이른바 디저트 코스에 들어간 후에 탁상연설을 하는 것이 유행하는 듯하다. 그건 연설을 싫어하는 인간에게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모처럼 식욕을 만족시킨 후에 아이스크림이나 커피를 맛보며 기분 좋게 즐기려 할 때 연설이 시작되는 것이다. 별로 재미도 없고 때로는 오히려 불쾌하기까지 한 연설을 참으며 듣는 것은 그래도 괜찮다고 쳐도, 가끔 간사라든지 신세를 진 사람에게서지명이라면서 억지로 뭔가 말을 해 보라고 강요당한다. 그래도 완강히 버티면 나중에 연설하는 사람의 연설에서 공격당한다. 성가신 일이다.

그건 어쨌든 역시 서양 사람을 흉내 내서 일어난 일임은 틀림이 없다. 불행히도 서양 사교계에 얼굴을 비친 적도 없으며 나간다 한들 언어를 잘 모르니 서양의 탁상연설이 얼마나 악랄한지 바보 같은지는 알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일본의 탁상연설과 비교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맨 처음 그런 짓을 시작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재미있는 것을 발명한 것이다.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기분이 되었을 때 일어나서 뭔가 경구(警句) 같은 것을 뱉어내어 손님들을 감탄시키거나 쿡쿡 웃게 하는 것은 제법 그럴듯한 향락이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그런 걸 하기에는 이른바 디저트 코스에 들어가서 하는 것이 극히 적절한 시기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즉 일종의 생리적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대접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되는 것은 요리라면 싫은 요리는 안 먹으면 되지만 이 연설만은 억지로 강요받는다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탁상연설이 너무 유행하면 무심코 탁상기분을 탁상 이외로 확장하는 듯한 관습을 조장해서, 탁상사상이나 탁상예술의 유행을 보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식자(識者)의 일고(一考)를 기대해본다.

 

3. 라디오포비아

처음으로 라디오를 들은 것은 우에노의 S()이었던 것 같다. 네다섯 명이 식사를 한 후, 객실에서 느긋하게 재미있게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갑자기 머리 위에서 기이기이기이기이하고 네 번 이어서 묘한 소리가 났다. 마치 닭의 목이라도 조르는 듯한 불쾌한 소리였다. 그리고는 같은 목소리로 뭔가 이어서 얘기를 하는 듯했는데, 뭘 말하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어서 동행자에게 물어보니 ‘JOAK, 여기는 도쿄방송국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했다. 그리고는 음악인지 뭔지가 시작해서 가-가 하는 소리와 윙윙 울리는 샤미센 소리에 우리들의 담화는 완전히 착란 되어 버렸다. 그 후에도 가끔 여러 장소에서 이 JOAK에게 습격당했다. 익숙해지니 과연 JOAK로 들린다. 제에 오오 에에 케에이로 묘한 억양을 붙여서, 그리고 억지로 서양인처럼 내는 목소리로 외치는 것이 그리 좋은 기분이 들지 않는다. 이 네 개의 알파벳의 조합 자체가 뭔가 불쾌한 암시를 포함하고 있거나, 아니면 가장 처음 들었던 소리의 불쾌한 인상이 이 소리를 들을 때마다 새롭게 환기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분야에 밝은 사람에게 물어보니, 음식점이나 가게 앞에 있는 확성기가 불완전하여서 이런 소리가 나니 잘 조절된 기계에서 광석검파기(鑛石檢波器)를 쓰고 귀에 대는 수화기를 쓰면 그런 일은 없다고 한다. 하지만 머리에 금속 그릇을 써 가면서까지 듣고 싶은 것은 거의 없는 듯 하다.

여름 휴가 중 어느 날 M 군과 둘이서 시모타카이도(下高井戸: 도쿄도 스기나미 구의 쵸명) Y()이라는 곳에 가서 한나절을 대단히 느긋하게 놀고는 저녁을 먹었다. 마침 우리 말고는 손님이 하나도 없는 그믐 달밤은 더할 나위 없이 한적했다. 식사도 끝나서 슬슬 돌아가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계단 아래에서 JOAK가 시작됐다. 이런 교외까지 JOAK가 쫓아오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다. 그날 밤은 마침 트리오로 차이콥스키의 가을의 노래 등도 있었다. 주위가 조용해서인지, 아니면 기계가 좋은 건지, 내 머리가 어떻게 됐던 건지, 그 트리오만은 좀 재미있게 들렸기 때문에, 계단 위에 앉아서 끝까지 들었다. 이 정도라면 라디오도 그리 두려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후 어느 휴일 오후, X심포니의 방송이 있었을 때, 긴자에 있는 찻집에 들어가 봤다. 역시 무리였다. 모든 악기가 단지 일색의 잡음 덩어리가 되어, 바깥을 달리는 전철의 울림과 대항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곡의 겉모습이라도 알기 위해서 참고 듣고 있으니,점원이 뭔가 좀 고쳐보려고 했는지 플러그를 멋대로 뽑았다가 다시 꽂았다 하는 통에 모처럼의 심포니는 무참히 끊겨 버렸다.

이런 이유로 자연히 라디오라는 것에 대해 일종의 공포를 느끼게 되어 보니, 저 집집들의 옥상에 널려있는 안테나에 대해서도 동정하기 힘든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런 편견이 없더라도 아마도 저것은 그리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장대 같은 것에 흔들흔들 휘는 철사를 박아놓은 것은 묘하게뭔가를 바라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저런 식으로 안 해도 괜찮은 방법이 있다고도 한다.

라디오를 만지고 있다가 자기도 방송을 하고 싶어져서, 마침내 장난방송을 시작했다가 잡힌 사람이 있다. 하지만 이런 사람은 믿음직한 구석이 있다.

현상의 본성에 관한 충분한 지식 없이, 그저 전기 테크닉의 겉 부분 만을 대충 아는 것만으로 완전히 라디오 통이 되어버린 이른바 팬이, 전파(電波) 전파(傳播) 현상을 조금도 신기하게 여기지도 않고 만사를 이해한 듯한 얼굴을 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한 물리학자가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물리학자 자신도 방심하면 비슷한 물리학 팬이 되어버린다. 상대성이론 팬, 양자론 팬이 될 우려가 좀 있다. 이것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4. 침입자

교외의 시골에 약간의 땅을 얻어서, 휴일마다 좋은 공기를 마시고 머리를 식히기 위한 집을 지었다. 어느 땅에는 꽃이라도 심어서 화원을 만들어 보려는 아름다운 꿈도 꿨지만, 그것은 그냥 꿈이라는 것을 바로 알게 되었다. 겨우 꽃의 싹이 트게 되자, 아마 마을의 아이들일 텐데, 집 지키는 사람도 아무것도 없는 집 안에 멋대로 들어와서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뜯고 파버린다. 알뿌리 종류는 뜯기도 쉽겠지만 작은 새싹마저도 정성껏 뽑아서 근처에 버리고 있다. 세세하게 밀집되어 난 묘상(苗床)을 짚신인지 뭔지로 짓밟기도 한다. 완전히 실패하고 나서 다음 해에는 특별하게 화단을 만드는 대신에 곳곳마다 잡초 사이의 눈치채기 힘든 곳에 씨를 뿌리고 모종을 심기도 해 보았지만 역시 실패했다. 누군지도 모를 침입자는 놀랍도록 예민한 감각으로, 보물찾기라도 하는 듯한 기분으로 찾아내는지 거의 남김없이 뽑아내 버렸다. 예를 들어 해바라기나 채송화가 아직 작을 때, 씨를 뿌린 당사자라도 찾아내려면 고생을 해야 할 정도로 구석진 곳에 숨어있더라도 어느샌가 뽑혀 있는 것에 놀랐다. 이만큼 섬세한 일을 하는 것은 아무래도 여자아이 같다. 어느 날 혼자서 갔을 때, 정원 쪽에서 아이 목소리가 들려서 유리창 너머로 봤더니 13세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 네다섯 명이 대나무 막대기로 잡초 안을 찌르고 있었다. 내가 있는 것을 눈치채더니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서는 별로 놀란 것 같지도 곤란해 하는 것 같지도 않은 듯한 모습으로 어디론가 가 버렸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이 침입자들이 손을 대지 않고 내버려두는 몇 종류인가의 화초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건 코스모스와 개양귀비, 그리고 앵초다. 접시꽃이나 나팔꽃 등이 아직 새싹일 때라도 발견되어 뽑혀버리는데 이 세 종류만은 어째서인지 약탈을 면하고 기세 좋게 증식한다. 2, 3년간 완전히 주변을 덮어서, 이제는 도저히 아이 몇 명이 어떻게 해볼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 꽃들이 이곳의 아이들에게는 흔해서인가 하고 생각도 해 봤지만, 사실은 이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개양귀비는 이 근처의 민가의 뜰에서는 거의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드물지 않은 일일초가 오히려 정성스레 뽑혀나갔다. 또 코스모스는 흔하지만 뽑혀나가지 않는 쪽이었다.

혹은 이 세 식물의 번식력이 왕성하다는 것을 침입자들이 알고 있어서라고 생각해 보았지만, 이것도 너무 끼워 맞추는 식의 설명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여러 가지 꽃이 여러 가지 나비나 벌레를 끌어들이는 능력에 대해서는 아마도 아직 인간이 잘 모르는 신비로운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와 같이 여러 가지 화초가 아이들의 약탈취미를 자극하는 효과의 차이에 대해서도 아직 간단한 설명을 허용하지 않는 비밀스러운 법칙이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곤충의 연구자가 나비나 개미를 연구하듯이, 이 작은 약탈자들의 습성을 연구할 목적으로 여러 가지 실험을 해 보면 필시 재미있고 또 유익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나는 그럴만한 여유도 정열도 없다. 다만 1, 2년 더 지나서, 우리들도쿄 사람에 대한 아이들의 호기심과 반감이 한참 감소했을 때에 다시 한 번꽃밭의 꿈을 꾸는 것이 좋을 것 같다.

 

5. 풀베기

저택 안에 풀 한 포기도 없는 자각을 향수하기 위해, 일부러 사람을 고용해서까지 뒤뜰의 구석구석에서 깨끗하게 풀을 뽑아버리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의 기분이 적어도 어릴 적에는 몰랐다. 왜 풀이 자라서는 안되나 하고 아무래도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땅에서 나는 식물 중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모처럼 자란 것이 깨끗하게 뽑혀 나가는 것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옛 성터나 다른 황무지에 기세 좋게 자란 잡초는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그런 곳에 드러누워 새의 노래, 벌이 윙윙거리는 것을 듣는 것은 유쾌했다. 유화의 풍경화 등에서도, 부서진 울타리, 과일나무의 앞으로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듯한 제재(題材)는 지금도 가장 마음을 끌어당긴다.

도쿄에 집을 가지고 나서의 일이다. 어느 날 순사가 찾아와서는, 앞 담장에 풀이 너무 나 있으니 뽑도록 주의하고 갔다. 보아하니 과연 검게 썩은듯한 담벼락의 뿌리 부분에 여러 가지 풀이 새파랗게 무성하고, 개중에는 작은 꽃을 피우고 있는 것도 있었다. 딱히 더럽지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마도 담장보다도 그 앞의 수채보다도 이 풀들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했지만, 경찰관이 하는 말이니 그 말대로 풀을 뽑아버렸다.

남들처럼 화초의 씨를 스스로 뿌려보고, 비로소 잡초의 안 좋은 부분을 좀 알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만히 두면 모처럼 오래 살려보려고 한 화초가 모두 지고 마니까, 이렇게 되면 안타깝지만 잡초 쪽을 뽑을 수밖에 없다. 잡초라는 말의 의미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교외에 집을 구했다. 초봄부터 여러 가지 풀이 난다. 그중에는 꽃이 피면 꽤 아름다운 것도 있다. 하지만 또 멋대로 불어나 버려서 걷는 것을 방해하기도 한다. 신경 쓰지 않고 내버려두면 마침내 집 안까지도 침입할 것 같은 기세를 보인다. 이렇게 되니 과연 잡초의 위협이라는 것을 느껴서, 마침내 풀베기를 할 결심을 했다. 풀을 베는 낫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을 이때 알았다. 낫 쓰는 법, 낫 가는 법도 농부의 전수를 받아서 마침내 달라붙었다.

베기 시작해 보니 몹시 힘들었다. 제법 벤 것 같아도 일어나서 보면 손바닥만큼밖에 진행되지 않아서 실망했다. 하지만 하는 중에 점점 풀베기 자체에 흥미가 생겨서 결과를 재촉할 기분이 없어지는 것을 느꼈다.

잘 드는 낫으로 베면 상쾌함을 느낀다. 또 풀뿌리를 팍팍 베는 것도 통쾌하다. 가려운 곳을 긁는 듯한 기분이 든다.

여러 가지 풀뿌리 뻗는 법에 각각 차이가 있다는 것을 눈치챈다. 그것들의 목적론적 의의를 생각해 보는 것도 꽤 재미있다. 같은 면적을 계절에 따라 다른 잡초가 교대로 점유하는 순서도 재미있고, 해에 따라 가장 많이 번식한 풀의 종류가 달라지거나, 그것이 인간의 간섭 때문에 영향받는 모습이나, 좀 더 깊이 연구해 보면 일종의잡초학이 성립될 것 같다. 그것을 여기에 쓰면 끝도 없으니 생략하겠다. 그저 한가지 염두에 둘 문제만을 간단히 써 둔다.

잡초 중에는 우리가 재배하는 오곡이나 야채나 관상식물과 아주 닮은 것이 매우 많다. 혹시 이러한 잡초를 특히 아끼고 배양하고 교육해 가면, 몇 대 후에는 오히려 현재의 유용한 식물들보다 유용한 것이 생겨날 가능성은 없을까?

오랜 기간 인간이 눈엣가시로 보고 학대받으면서도 강인한 저항력으로 생존해온 고양이풀이나 왕바랭이등을 갑자기 온실 안의 옥토로 옮기고 온갖 유효한 비료를 준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때에 따라서는 비료 식중독으로 죽을지도 모른다. 가난할 때는 딱딱했던 것이 부자가 되어 갑자기 부드러워지듯이 어쨌든 부드러워질 것 같다. 그 대신 그 풀들의 열매가 점점 발육, 진화하여 쌀이나 보리보다도 좋거나 혹은 적어도 동등한 곡식이 되지는 않을까.

혹시 배양하는 법에 따라서 강인한 저항력을 보존하고, 또 열매는 충실하게 될 수도 있다면 더욱 좋다. 그런 것을 바랄 수는 없을까.

누군가, 속는 기분으로 이 실험에 착수해 볼 사람은 없을 것인가.

 

6. 지푸라기가 솜이 된다는 이야기

지푸라기에 어떤 약품을 가해서 삶기만 하면 솜으로 바꿀 수 있다는 방법을 발명했다고 주장하며, 몇몇 자본가들에게서 돈을 모은 사람이 있다. 그런데 이것이 사기라고 하여 검거되어, 경시청의 관계자들 앞에서실험을 해 보이게 되었다. 반나절을 삶아서 펄프 같은 것이 생겼다. 다음날이 되면 솜이 되어야 하는데 아무리 지나도 되지 않아서 사기라고 결정이 났다. 이런 이야기가 신문에 났다는 것이다. 신문기사니까 실제 사건의 진상은 잘 모르겠다. 단지 이것과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주 있는 일이다. 어떻게 신비적인 방법으로 괜찮게 돈을 벌 수 없을까 하고 생각해서 그것을 찾아다니는 자본가 앞에, 그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출현하는 것이다. 악마라도 불러낼 것 같지 않은 사람 앞에는 그렇게 버릇없게 나타나지 않는다.

속이는 쪽도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속는 쪽도 이 현상의 첫 번째 원인으로서의 책임은 있다. 혹시 현대과학을 이해하고 있는 오오오카 에치젠노 카미(大岡越前守:오오오카 타다스케(大岡忠相), 에도시대의 인물로 공정한 재판관으로 알려짐)가 이 사건을 재판한다면, 속은 쪽도 꾸짖음 정도는 들을 것 같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다만 좀 생각해보고 싶은 것이 한 가지 있다.

경시청에서 실험을 시작해서, 계속해서 실험을 하는 동안 그 사람의 머릿속에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설사 그때까지는 펄프와 솜을 바꿔치기하는 속임수를 쓰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더라도, 그 때는, 하고 있는 중에 혹시나 정말 펄프가 솜으로 변할지도 모르겠다는 이상한 기분을 스스로 고무시켜서 비커 속을 휘저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의심이다.

하고 있는 중에 입회한 관계자들의 눈을 속여서 바꿔치려고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상식적인 해석으로, 그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이었을지 어떨 지가 문제인 것이다.

거짓말도 계속 하다 보면 종국에는 스스로도 그것을믿게된다는 것은 잘 알려진 현상이다. 여러 가지기적’, 예를 들면 천리안, 투시 등을 하는 사람 중에서도, 그림자 속에 숨어있는 조수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정말로 자신이 기적을 일으키고 있다는 듯한 기분을 느끼는 순간이 있고, 그것이 심해지면 자기 혼자서도 그것이 가능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순간도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수년간 계속해서지그스와 매기’(미국의 신문연재 4컷 만화인 ‘Bring Up Father’에 나오는 등장인물, 이 만화 자체의 별명이기도 했음.)를 그리고 있는 화가는, 결국에는 살아 숨 쉬는 지그스와 매기의 존재를 믿어 의심치 않게 되겠지만, 그것과 닮은 머릿속의 미혹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인가.

비커의 펄프가 솜으로 바뀔 때까지 있는 도중의 중요한 경로도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정말 별거 아닌 것으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 별거 아닌 것에 눈을 감아주면, 확실히 지푸라기가 솜이 된 것은 틀림없다. 고구마가 장어가 되기도 하는사실도 이와 같다. 점점 이사실에 익숙해지면 결국에는 그 이른바별거 아닌경로를 생략해도 같은 결과가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아닐까. 머리가 냉정한 상태에서는 그런 일은 없을 거라 해도, 절박한 사태에 놓여서 머리가 놈 불투명해진 상황에서는 의외로 있을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건은 보기에 따라서는 멍청한 장난질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또 범죄심리학자의 연구 자료라도 된다면, 과학적 인식론의 선생이 인과율의 강의를 할 때의 재료도 될 수 있다.

인과를 잇는 뜨개질의 고리는 딱 하나만 빠져도 연이 끊어진다. 이 명백한 진실을 우리들은 곧잘 잊거나 속이거나 하는 일이 있다. 우리의 잘못의 대부분은 여기에서 온다. 철도나 비행기의 고장도 이러한 종류에 속하는 것이 많다. 풍기문란, 풍속퇴폐 같은 현상도 대부분은 이것과 비슷한 일이 근본원인이다. 무심코 이 서툰 마술사를 비웃을 수는 없다.

(타이쇼 14 11, 추오코론(中央公論))

http://www.aozora.gr.jp/cards/000042/card245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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