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오카와의 물(大川の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나는 오오카와바타(大川端)[각주:1]에 가까운 마을에서 태어났다. 집을 나와 모밀잣밤나무의 새잎에 덮인, 검은 담이 많은 요코아미(横網)의 골목을 빠져나오면 바로 그 폭 넓은 강줄기가 보이는 햡폰구이(百本杭[각주:2])된 강기슭에 나오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중학교를 졸업할 때 까지, 나는 거의 매일같이 그 강을 보았다. 물과 배와 다리와 모래톱과 강 위에서 태어나서 강 위에서 사는 분주한 사람들의 생활을 보았다. 한여름 정오가 약간 지나서 달구어진 모래를 밟으면서 수영을 배우러 지나가는 길에 맡고 싶지 않아도 맡은 강물 냄새도, 지금에 와서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친근하게 떠오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나는 어째서 이렇게도 그 강을 사랑하는가. 그 어느 쪽인가 하면 진흙으로 탁한 오오카와의 미지근한 물에 한없는 그윽함을 느끼는가. 스스로도 조금도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답답할 수밖에 없다. 단지 나는 옛날부터 그 물을 볼 때 마다, 왜인지 눈물을 흘리고 싶은 듯한, 표현하기 어려운 위안과 적요(寂寥)를 느낀다. 완전히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 멀어져서 그리운 사모(思慕)와 추억의 나라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 기분 때문에 이 위안과 적요를 맛볼 수 있으므로, 나는 무엇보다도 오오카와의 물을 사랑하는 것이다.

  은회색의 안개와 파란 기름 같은 강물과 한숨 같은 불안한 기적(汽笛)소리와 석탄선의 다갈색 삼각돛과, ──모두 누를 길 없는 애수를 부르는 이 강의 조망은, 어찌 나의 어린 마음을, 그 강기슭에 선 버드나무 잎처럼 떨리게 할 것이다.

  근 삼년간, 나는 야마노테(山の手) 교외의, 잡목림 그늘이 진 서재에서 평정(平靜)한 독서삼매에 젖어있었지만, 그래도 역시 월에 2,3차례는 그 오오카와의 물을 보러가는 것을 잊지 않았다. 움직이는 것 같지도 않게 움직이고 흐르는 것 같지도 않게 흐르는 오오카와의 물색은, 정적(靜寂)한 서재의 공기가 쉬지 않고 주는 자극과 긴장에 안타까울 정도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내 마음도, 마치 긴 여행에 나선 순례자가 겨우 다시 고향의 땅을 밟았을 때 같은 쓸쓸한, 자유로운, 그리움에 녹여준다. 오오카와의 물이 있어서 비로소 나는 다시 순수한 본래의 감정으로 살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몇 번이나 푸른 물에 면한 아카시아가 초여름의 부드러운 바람에 흔들려서 팔랑팔랑 하얀 꽃을 떨어트리는 것을 보았다. 나는 몇 번이나 안개가 많은 11월의 밤에 어두운 물의 하늘을 추운 듯이 우는 물떼새의 목소리를 들었다. 내가 보고 내가 들은 모든 것은 모조리 오오카와에 대한 내 사랑을 새롭게 한다. 마치 여름 강물에서 태어나는 검은물잠자리의 날개 같이 떨기 쉬운 소년의 마음은, 그때마다 새로운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특히 밤그물을 친 배의 뱃전에 기대서 소리도 없이 흐르는 검은 강을 바라보면서 밤과 물의 가운데를 떠도는 ‘죽음’의 호흡을 느꼈을 때, 어찌 나는 의지할 길 없는 쓸쓸함에 닥치게 되었으리라.

  오오카와의 흐름을 볼 때 마다 나는 그 승원(僧院)의 종소리와, 백조의 목소리로 저무는 이탈리아의 물의 도시 ──발코니에 핀 장비도 나리도 물밑에 잠긴 듯한 달빛에 파르스름해지고 검은 관을 닮은 곤돌라가 그 중간을 다리에서 다리로 꿈처럼 저어가는 베네치아의 풍물에 넘칠듯한 정열을 쏟았던 단눈치오의 기분을 새삼스럽듯이 그립게,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 오오카와의 물에 애무받는 연안 마을들은 모두 나에게 있어서 잊기 힘든 그리운 마을이다. 아즈마바시(吾妻橋)에서 하류라면 코마가타(駒形), 나미키(並木), 쿠라마에(蔵前), 다이치(代地), 야나기바시(柳橋), 혹은 타다(多田)의 야쿠시마에(薬師前), 우메호리(うめ堀), 요코아미(横網)의 강기슭── 어디라도 좋다. 이러한 마을을 지나가는 사람의 귀에는 햇빛을 받는 흙으로 지은 광의 하얀 벽과 하얀 벽 사이에서, 격자문으로 된 어두침침한 집과 집의 사이에서, 혹은 은갈색의 싹을 틔운 버들과 아카시아의 가로수 사이에서, 잘 닦인 유리판처럼 파랗게 빛나는 오오카와의 물은 그 시원한 바닷물의 냄새와 함께 옛날부터 남으로 흐른 그리운 울림을 전해줄 것이다. 아아, 그 물소리의 그리움, 중얼거리듯이, 삐친 듯이, 혀를 차듯이, 풀물을 짜낸 파란 물은 낮도 밤도 똑같은 듯이 양안(兩岸)의 석축을 씻고 간다. 한죠(班女)고 나리히라(業平[각주:3])고, 무사시노(武蔵野)의 옛날은 모르고, 멀게는 많은 에도죠루리(江戸浄瑠璃) 작자, 가깝게는 카와타케 모쿠아미(河竹黙阿弥[각주:4]) 옹이 센소지(浅草寺)의 종소리와 함께 그 살인현장의 스팀뭉그(Stimmung)를 가장 강력하게 나타내기 위해서 자주 그 서민물의 안에 준비한 것은 실로 이 오오카와의 쓸쓸한 물울림이었다. 이자요이(十六夜) 세신(清心)이 몸을 던졌을 때도, 겐노죠(源之丞)가 새쫓기[鳥追]를 하던 오코요(おこよ)에게 첫눈에 반했을 때도, 혹은 또 땜장이 마츠고로(松五郎)가 박쥐가 어지럽게 나는 여름 저녁, 저울을 짊어지고 료고쿠(両国)의 다리를 건넜을 때에도 오오카와는 지금처럼, 낚시꾼여관의 선창에, 강기슭의 푸른 갈대에, 쵸키부네(猪牙船[각주:5])의 선복(船腹)에 나른한 속삭임을 되풀이 하고 있었다.

  특히 이 물소리를 그립게 들을 수 있는 것은 나룻배 안에서일 것이다. 내 기억에 틀림이 없다면, 아즈마바시에서 신오오바시(新大橋)까지, 원래는 다섯 개의 나루터가 있었다. 그중에서 코마카타 나루터, 후지미(富士見) 나루터, 아타카(安宅) 나루터 세 개는 차례로 하나씩 언제인지도 모르게 쇠퇴해서 지금은 단지 이치노하시(一の橋)에서 하마쵸(浜町)로 건너가는 나루터와 미쿠라바시(御蔵橋)에서 스가쵸(須賀町)로 건너가는 나루터 두 개가 옛처럼 남아있다. 내 어릴 적과 비교하면 강물의 흐름도 바뀌어 갈대와 물억새가 무성했던 곳곳의 모래톱도 흔적없이 묻혀버렸지만 이 두 나루터만은 비슷한 깊이가 얕은 배에 비슷한 노인 뱃사공을 태우고 강기슭의 버들잎처럼 파란 강물을 지금도 변함없이 하루에 몇 번씩인가 가로지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자주 아무런 용무도 없는데도 이 나룻배에 탔다. 물의 움직임에 따라서 요람처럼 가볍게 몸이 흔들리는 기분 좋음. 특히 시각이 늦으면 늦을수록 나룻배의 쓸쓸함과 기쁨이 절실히 몸에 사무친다. ──낮은 배의 바깥은 바로 녹색의 미끄러운 물로, 청동같은 무딘 빛이 나는 폭넓은 수면은 먼 신오오바시에 가로막히기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양안의 집집은 이미 황혼의 회색으로 통일되어 그 곳곳에는 장지에 비치는 등불의 빛조차 노랗게 안개 속에 떠 있다. 밀물을 따라 회색의 돛을 반쯤 편 거룻배가 한 척 두 척 가끔 강을 거슬러 오지만 어느 배도 고요히 잠잠해서 키를 잡은 사람의 유무조차도 알 수 없다. 나는 언제나 이 조용한 배의 돛과 파랗고 평평하게 흐르는 바닷물의 냄새에 대하여 뭐라 말할 것도 없이, 호프만스탈(Hugo von Hofmannsthal[각주:6])의 에르레브니스(Erlebnis)라는 시를 읽었을 때 같은, 설명하기 어려운 쓸쓸함을 느끼는 것과 함께, 자신의 마음속 또한 정서의 강의 속삭임이 안개의 바닥을 흐르는 오오카와의 물과 같은 선율을 노래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나를 매혹하는 것은 오오카와의 물의 울림 혼자만은 아니다. 나에게 있어서는 이 강물의 빛이 거의, 어디서도 찾아내기 힘든 미끄러움과 따뜻함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바닷물은 마치 벽옥의 색 같이 너무도 무거운 녹색을 엉기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조수의 간만을 전혀 느끼지 않는 상류의 강물은 말하자면 에메랄드빛처럼 너무 가볍고, 너무 얄팍하게 빛난다. 오직 담수와 조수(潮水)가 교차하는 평원의 대하(大河)의 물은 차가운 파랑에 탁한 노랑의 따뜻함을 뒤섞어서 어딘지 모르게 인간화된 친절함과, 인간같은 의미에 있어서 라이프라이크한 그리움이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특히 오오카와는 검붉은 점토가 많은 칸토평야를 모두 지나서, ‘도쿄’라는 대도시를 조용히 흐르는 만큼, 그 탁하고 주름지고 깐깐한 유대인 노인처럼 툴툴 잔소리를 하는 물색이 어찌나 안정된, 친밀한, 촉감 좋은 느낌이 있다. 그리고 같은 도시 안을 흐른다고 해도, 역시 ‘바다’라는 커다란 신비와 끊이지 않고 직접 교통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인지, 강과 강을 잇는 수로의 물 같이 어둡지 않다. 잠들어있지 않다. 어딘지 모르게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게다가 그 움직여가는 끝은 시작도 끝도 없이 건너가는 ‘영원’의 신비함이라는 기분이 든다. 아즈마바시, 우마야바시(厩橋), 료고쿠바시(両国橋) 사이, 향유 같은 푸른 물이 커다란 교대(橋臺)의 화강석과 벽돌을 적시고 가는 기쁨은 말할 것도 없다. 강기슭에 가까운, 낚시꾼여관의 하얀 사방등을 비추고, 은색 잎 뒤쪽을 뒤집는 버들을 비추고, 또 수문에 막혀서는 샤미센(三味線) 소리가 미지근해지는 오후를 홍부용(紅芙蓉) 꽃에 슬퍼하면서, 심약한 집오리의 깃털에 어지럽혀져서, 인기척 없은 주방 아래를 조용히 빛나면서 흐르는 것도, 그 묵직한 물색에 말할 수 없는 온정을 품고 있다. 설사 료고쿠바시, 신오오바시, 에타이바시(永代橋)와, 하구에 가까워짐에 따라 물색은 현저히 난조(暖潮)의 심남색(深藍色)을 섞어가면서 소음과 연진(煙塵)으로 가득 찬 공기 아래에, 하얗게 짓무른 눈을 번뜩번뜩 함석처럼 반사하고, 석탄을 쌓은 큰 화물선이나 하얀 페인트가 벗겨진 고풍스러운 증기선을 나른하게 흔드는 것 역시 자연의 호흡과 인간의 호흡이 맞아떨어져서, 어느새 융합한 도회의 물색의 따뜻함은 쉽게 지워져버릴 것이 아니다.

  특히 해질녘, 강 위에 자욱이 낀 수증기와 서서히 어두워져가는 저녁하늘의 어스름은, 이 오오카와의 물을 거의 비유를 초월한 미묘한 색조를 띠게 한다. 나는 홀로 나룻배의 현에 팔꿈치를 걸치고, 이미 안개가 내리기 시작한 어스름한 강의 수면을 이렇다 할 것도 없이 바라보면서, 그 암록색의 물 저편, 어두운 집들의 하늘에 크고 붉은 달이 뜨는 것을 보고, 무심결에 눈물을 흘린 것을, 아마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모든 마을은, 그 마을 고유의 냄새가 있다. 플로렌스의 냄새는 아이리스의 흰 꽃과 먼지와 안개와 옛 회화의 니스의 냄새이다.’(메레쥐코프스키[각주:7]) 혹시 나에게 ‘도쿄’의 냄새를 묻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오오카와의 물 냄새라고 대답하는 것에 어떠한 주저도 하지 않을 것이다. 냄새 하나뿐만은 아니다. 오오카와의 물색, 오오카와의 물소리는 내가 사랑하는 ‘도쿄’의 색이고 소리여야 한다. 나는 오오카와가 있으므로 ‘도쿄’를 사랑하고, ‘도쿄’가 있으므로 생활을 사랑하는 것이다.

(1923. 1)

그 후 ‘이치노하시 나루터’가 끊어진 것을 들었다. ‘미쿠라바시 나루터’가 사라지는 것도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http://www.aozora.gr.jp/cards/000879/card123.html

  1. 도쿄, 스미다가와(隅田川) 하류. 특히 아즈마바시(吾妻橋)에서 신오오하시(新大橋)부근까지의 우안(右岸)일대를 가리킴 [본문으로]
  2. 현재의 스미다가와의 강기슭은 콘크리트등으로 처리되어 있지만 당시는 수많은 말뚝을 박아 강기슭을 보호해서 백개의 말뚝이라는 햡폰구이라는 말이 붙었음 [본문으로]
  3. 한죠도 나리히라도 노(能)의 한 곡 [본문으로]
  4. 1816~1893, 가부키의 각본가 [본문으로]
  5. 에도시대에 하천에서 널리 사용된 경쾌하고 빠른 배 [본문으로]
  6. 후고 폰 호프만스탈, 1874~1929. 오스트리아의 시인, 극작가 [본문으로]
  7. Дмитрий Сергеевич Мережковский, 1865~1941, 러시아의 시인, 사상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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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학소년 2012.05.15 08:00 신고

    공부하는데 도움이 되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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